두 번 만난 환자

만나는 모든 환자가 인연이다.
병원 실습 중에 만난 대부분의 환자들이 기억에 남지만, 여러 번 만난 환자들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 중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5월의 첫날, 본과 3학년이 되어 첫 병원 실습으로 2주간의 신경과 실습을 마치고 곧이어 맞이한 응급의학과 실습 기간이었다.
일요일 오전부터 응급실에서 학생 당직 실습을 시작했다.
관찰실과 소아응급실에서의 실습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외상 파트에 당직 실습을 하러 갈 때에는 이미 밤 늦은 시각이었다.
그 시간대에 새로 도착하는 환자는 드물었고 가끔씩 가벼운 찰과상을 입고 찾아온 환자들에 대한 처치를 도우면서 시시하다는 생각과 아쉽다는 생각, 얼른 쉬러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에 새로운 환자가 도착했다.

F/22.
나와 동갑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뒤에서 굴삭기가 들이받았다고 했다.
다른 부위는 괜찮았지만 왼쪽 허벅지에서 근막과 피부가 분리되어 너덜너덜했다(degloving injury).

수액, 항생제, 진통제를 주는 것 이외에 외상 파트에서 해줄 일은 상처를 씻기고 소독하고 거즈로 감싸주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생리식염수통을 준비하는 일만 했지만 일손이 부족했기 때문에 나중에는 상처 씻기는 일을 도왔다.
거즈 드레싱이 끝나고 환자가 정형외과로 전과되는 것까지 지켜본 뒤에 그날의 실습을 끝냈다.

나와 동갑이었기 때문인지, 그렇게 심한 외상을 당한 환자를 처음 보았기 때문인지, 상처 세척을 처음 해보았기 때문인지, 사고 소식을 듣고 찾아와 슬퍼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인지 그 환자는 기억에 남았다.

그 이후로도 병원 실습은 계속되었고,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를 차례대로 돌면서 매 주마다 새로운 환자들을 만났다.
배정 받은 환자를 만나 병력청취와 신체검진을 하고 의무기록을 읽어보고 해당 질환을 공부하고 증례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만나본 환자 숫자가 늘어갈수록 환자를 만나는 두려움은 점차 줄어들었지만, 설렘과 기대감도 함께 줄어들었다.

어느덧 11월이 되어 정신과 실습을 하게 되었다.
실습 학생들이 정신과에 입원한 환자들을 대상으로 오락회를 준비하는 순서가 있었다.
과자 높이 쌓기, 탁구공으로 물병 쓰러뜨리기, 장기알 컬링 등의 오락을 준비하여 다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오락회가 끝난 뒤에 환자들과 함께 과자를 나누어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환자들이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낯이 익었다.
이름을 들을 때까지는 잘 몰랐지만 올해 초에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에 외상후스트레스장애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아닐지 몰라 아는 척을 하지 못했지만, 응급실 당직 실습과 정신과 실습을 같이 했던 동기형에게 물어보니 그 환자가 맞는 것 같다고 했다.
예전에 응급의학과에 제출한 증례 보고서를 찾아보니 짐작이 맞았다.

그러나 다음날 실습을 하러 정신과 병동에 가서 그 환자를 만났을 때에 아는 체를 할 수는 없었다.
응급실에서의 만남이 나에게는 유익하고 인상 깊은 경험이었지만, 그 환자에게는 아프고 부끄럽고 기억하기 싫은 경험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나를 기억해주고 알아본다면 나도 아는 체를 했겠지만 그 환자는 나를 모르는 눈치였다.

같은 환자를 서로 다른 과에서 또 다시 만나는 것이 반갑기도 했고 신기하기도 했다.
각각 따로 배웠던 교통사고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하나의 환자가 겪을 수 있는 일련의 경과라는 것이 생생하게 와닿았다.
정신과 병동 복도를 잘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움도 느꼈지만 보람도 느꼈다.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만났을 때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지금 최선을 다해야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대로 정신과 실습은 끝났다.
그 이후로 그 환자를 또 다시 만난 적은 없었다.

졸업을 앞두고 의대 6년을 되돌아보면서 그 환자가 생각난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잘 치료되었는지, 원래의 직업으로 돌아가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3줄 요약

  1. 본과 3학년 초 응급의학과 실습 때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환자의 응급처치를 도왔다.
  2. 6개월 뒤 정신과 실습 때 우연히 그 환자를 다시 만났지만 아는 체를 하지 못했다.
  3. 신기함, 안타까움, 보람 등을 느꼈고, 만나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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