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학 개론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이 포스터 카피로 개봉 전부터 논란을 일으켰던 그 영화입니다.
누구나 첫사랑을 한다는 명제는 참이지만, 그와 비슷한 듯 보이는 이 명제는 자세히 생각해 보면 거짓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첫사랑의 대상은커녕 사랑의 대상도 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낭만은 담겨있지만 진실은 담겨있지 않은 카피로 많은 사람들에게 박탈감을 줍니다.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사랑

이 영화의 중심 소재는 첫사랑입니다.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여, 결혼할 사람이 있는 상황이라면?, 첫사랑의 첫사랑이 나라면? 등과 같은 설정을 덧붙여서 한 편의 이야기를 이끌어냅니다.
첫사랑은 대개 맺어지지 못하고 짝사랑으로 끝나고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습니다.
이 영화는 첫사랑이 맺어지지 못하는 이유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므로 관객들은 공감되어 웃다가, 울다가, 안타까워하다가, 부끄러워합니다.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누구나 첫사랑을 하고, 차이는 있더라도 첫사랑의 과정과 결과는 대개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적 배경

영화는 과거와 현재, 이렇게 두 축이 번갈아가면서 진행됩니다.

과거는 1996년을 배경으로 하여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의 시작과 끝을 보여줍니다.
따로 연도가 자막으로 표시된 것은 아니지만 이 때가 정확히 1996년인 이유는 영화 중 승민이 96학번 신입생인 점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예전 버스 노선번호들, 예전에 유행하던 자동차들, 삐삐 등의 소재가 등장합니다.

다른 축인 현재는 2011년을 배경으로 하여 첫사랑과의 조우를 보여줍니다.
역시 따로 2011년임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영화 포스터의 `15년만에 그녀를 다시 만나다`라는 표현으로부터 추측할 수 있습니다.

두 축이 번갈아 등장하는 과정에는 여러 소재들이 적절한 연결다리 역할을 하여 과거와 현재가 잘 이어지는 느낌을 줍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현재의 승민 역의 엄태웅과 스무살 승민 역의 이제훈은 비슷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야기가 잘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으나, 현재의 서연 역의 한가인과 스무살 서연 역의 수지는 서로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습니다.
물론 이를 좋게 받아들여 승민은 변하지 않았으나 서연은 바뀌었다는 점을 보여주려 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잘 이어지지 않는 느낌이 들었고, 이에 따라 몰입도 덜 되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공간적 배경

정해진 몇 곳이 번갈아 등장하여 딱히 한 곳이 중심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강의실, 정릉, 제주도 정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강의실은 대학 생활을 대표합니다.
승민이 서연에게 처음 반하는 장소이고, 승민과 서연이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는 과제물이 부여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신입생이 동아리 선배 오빠를 따라 같은 수업을 듣는다는 설정은 배경이 2학기(가을~겨울)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영화에 등장하는 몇 몇 단서로부터 영화 촬영은 경희대에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 이름들이 영화에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대학생활의 낭만을 담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잘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사족을 하나 더 덧붙이자면 연세대를 배경으로 설정했다면 승민은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학생, 서연은 음악대학 피아노과에 해당하게 됩니다.

정릉은 공간적 거리에 따라 달라지는 둘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보여줍니다.
서연이 아버지 친구 집에 임시로 사는 기간 동안 승민과 서연은 정릉이라는 같은 공간에 있게 됩니다.
둘은 같은 버스를 타기도 하고, 함께 사진을 찍으러 다니며 과제를 하기도 하고, 함께 빈집에 들어가서 집을 가꾸기도 합니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둘의 거리는 가까워지게 됩니다.
그러나 서연이 강남으로 이사를 가게 된 이후로는 둘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더 이상 멀어지지 않기 위해 서연에게 고백하려던 날, 오해는 더욱 깊어지고, 이에 실망하고 만취해서 택시를 타고 정릉으로 되가려는 승민의 모습은 단지 집으로 돌아가고자 함이 아닙니다.
정릉은 서연과 가까이 지내며 사이가 가까웠던 날들을 또한 의미하기 때문에, 다시 예전의 행복한 날들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승민의 안타까운 마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주도의 서연의 아버지 집은 중심 소재이기도 합니다.
담고 있는 의미가 너무 많아 뒤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GEUSS 셔츠, 휘어진 문짝

아픔을 담고 있는 소재들입니다.
승민은 아버지가 어려서 돌아가셨고, 어머니의 순대국 장사로 가난하게 삶을 꾸려왔습니다.
따라서 승민은 GUESS 셔츠를 살 수 없어서 그 모조품에 해당하는 GEUSS 셔츠를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 셔츠가 서연과 선배로부터 놀림거리가 되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입지 않습니다.
놀림에 상처받고 어머니께 꾸중 듣고 집을 뛰쳐나가는 승민이 발로 걷어찬 문짝은 휘어져 버렸습니다.
결혼을 앞둔 승민이 가난한 현실로 고뇌하면서 셔츠와 문짝을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어머니는 15년 전에 버렸던 GEUSS 셔츠를 여전히 입고 있습니다.
휘어진 문짝은 여전히 그대로이고, 튀어나온 부분이 녹이 슬어 버렸습니다.
승민이 손으로 다시 수리해 보려려고 하지만 망가진 채로 너무 오래 지나서 고쳐지지 않습니다.
아버지 없이 지낸 세월들, 가난한 현실과 어머니의 검소함, 승민의 무심함 등을 함께 보여주어 가슴을 에이는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기억의 습작, CD, CDP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소재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소재이기도 합니다.
기억의 습작은 첫사랑을 노래하는 가사와, 아름다우면서 서글픈 가락이 어우러진 노래입니다.
기억의 습작과 그 CD는 승민을 향한 서연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서연과 승민은 개포동 한 건물의 옥상에 올라 기억의 습작을 함께 들으면서 마음을 나눕니다.
서연은 미래의 집에 대한 계약금이라는 구실로 승민에게 CD를 줍니다.
승민은 반가운 마음으로 서연의 선물을 받아들지만, 가난한 자신의 집에는 CDP가 없어서 서연의 CD를 들어보지 못합니다.
결국 서연을 오해하고 그녀에게서 떠나는 승민은 CD를 돌려줍니다.
서연은 첫 눈 오는 날 승민과 만나기로 했던 빈 집에 찾아가서 CDP와 함께 CD를 다시 두고 갑니다.
영화에서는 그 이후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 승민은 그 빈 집에 들러 서연이 두고 간 CD와 CDP를 함께 가져간 것으로 나옵니다.
CD와 CDP의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승민은 서연이 다녀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CD와 CDP를 가져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서연은 승민이 버려두고 간 집모형을, 승민은 서연이 두고간 CD와 CDP를 간직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왜 그들이 다시 만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주도의 집

결론부터 말하면 제주도의 집은 서연 그 자체입니다.
이곳은 서연이 태어나 자란 장소입니다.
시멘트에 찍힌 발자국, 키를 재어 표시했던 벽이 남아 있습니다.
서연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와 서연이 함께 살았던 장소입니다.
서연이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에 아버지 혼자 지켜왔던 장소입니다.

서연이 오랜만에 제주도의 집을 찾는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되고, 서연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서연은 이혼 후에 새출발을 하기 위해, 전 남편에게서 받은 위자료로 집을 다시 짓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집을 완전히 부수고 새로 짓지는 못하고, 이전의 집을 큰 규모로 리모델링하는 데에 만족합니다.
리모델링하는 과정은 서연이 넓어지고 성숙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새로 지은 집은 승민이 건축가가 된 이후로 처음으로 짓는 집이 됩니다.
이것은 승민의 첫사랑이 서연이라는 점을 상징합니다.
새로 지은 집은 피아노를 들여놓으면서 구조를 변경하여 2층집이 되었습니다.
이는 서연이 대학교에 들어와서 상처 입고 포기했던 꿈인 피아노를 다시 찾았음을 의미합니다.
완성된 집의 아름다움은 당연히 서연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그 외에

이 영화에서 가장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캐릭터는 주인공들이 아니라 승민의 재수생 친구입니다.
영화를 유쾌하고 즐겁게 이어나가는 조미료 같은 역할을 합니다.

결혼을 앞둔 남자들의 흔한 고민과 방황을 볼 수 있습니다.

서연은 비록 피해자 중 하나이지만 썅년(악역)임은 분명합니다.
만약 승민이 파혼하고 서연과 결혼했다면 막장 드라마가 되었겠지만 그렇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첫사랑을 다룬 많은 로맨스 영화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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